10/2 화 맑음
어느 듯 배는 지주(貴州에) 닿았다. 드디어 황산을 향한 대장정이 시작 되는구나.
배에서 내리니 황산 행 버스가 줄지어 서 있는데, 그중 먼저 출발할 것 같은 버스를 골라 타니 내 옆자리엔 키가 장대만한 사내 하나가 앉아있다. 깜냥이 안경을 끼고 좀 배운 것 같아서 말을 걸었더니 당황스러워하며 옆자리에 앉은 딸에게 나와 영어로 대화해 보란다.
왕지양, 11살. 소학생인데 영어를 한다. 어디서 영어를 배웠냐니까 7세때부터 가정교사에게서 배웠단다. 그러고 보니 마누라 딸래미 모두 안경을 끼고 있다. 알고보니 키 큰 꺽다리가 변호사란다. 심심치 않게 이런 저런 얘길 나누며 음악도 들으며 가는데, 내가 중국노랠 들으니까 매우 신기해한다. 1시쯤 양구(陽口)에 도착해서 숙소를 찾다가 문득 그림을 버스에 두고 내렸다는 생각이 났다. 당황해서 버스를 찾으니 벌써 사라졌다. 삐끼들은 호텔 찾느냐고 달겨들고, 그들을 뿌리치면서 왕 변호사(율사)가족이 밥먹고 있는 식당으로 뛰어가 도움을 요청하니 밥을 먹다말고 버스 정류장에 가서 전화도 하고 난리를 친다.
미안하기도 하고, 내겐 나름대로 귀한 거라 찾아보다 안되면 포기를 할려고 했는데, 이리 저리 연락하더니 결국은 어떤 녀석이 택시를 타고 그림을 가져왔다. 고맙다며 내가 택시비를 내려하자 그가 재빨리 치루면서 나보고 식사를 같이 하잔다.
밥도 얻어먹고 황산 올라가는 택시비마저 그가 다 낸다. 북해에 도착하니 벌써 해가 진다.
황산의 초대소는 대 만원. 창문이 깨진 복도에 침대를 놓고 그게 하나에 70원이란다. 그나마 나는 외국인이라 묵을 수도 없단다. 마침 연휴라고 숙소마다 방이 다 찼단다...
북해 빈관에 가니 도미토리가 250원, 6인실이 싸 보여 그걸 달라니 없단다. 울며 겨자먹기로 거기서 자기로 하고 그들과 만나 밥을 먹으려 식당에 갔는데, 자리조차 나질 않는다.
이리 저리 헤메다 겨우 단체 급식소 같은데 가서 20원하는 밥을 먹는데, 이건 평지에서 파는 3원짜리보다 못하다. 그나마 왕이 어디서 맥주를 사 와서 허겁지겁 마시고 내일 새벽 5시 반에 일출을 같이 보기로 약속을 하고 잠자리에 들다.
1110/3 수 맑음, 비, 흐림, 다시 맑음
5시 모닝콜, 호텔에서 빌려준 외투를 입고 왕을 위해 여분으로 하날 더 빌려서 밖으로 나서니 왕가족이 기다리고 있다. 초대소 쪽 시닉 포인트가 더 좋다고 그리로 가잔다. 10월이라고 해도 살을 에이는 새벽 추위에 오돌 오돌 떨며 기다리니 잠시 후 여기 저기서 환성을 지른다.해가 여명을 뚫고 천천히 떠오르는 광경은 내 평생 잊을 수가 없으리라...기암 절벽을 뚫고 온 세상을 천천히 붉은 색으로 물 들이는 태양의 장엄함이란... 호텔로 돌아 오니 우린 운수가 좋은 편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황산에서 일출을 볼 확률은 50%란다.
그 기쁨도 잠시 후 철저히 무너졌다. 아침밥 한 그릇이 40원이란다.10원 주고 사발면 하나로 간단히 요기를 마쳤다. 더 이상 그들에게 신세지기도 버겁고. 8시, 중국은행 문 열기가 무섭게 우선 tc를 200불 환전을 했다.‘황산 천하 제 일경’이라다니 과연 그랬다.
깎아지른 기암 괴봉에 고고히 선 장송, 바람이 부니 어느 듯 비구름이 덮치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진눈깨비가 쏟아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가 쨍쨍 나고...등산로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가는데 갈 사람은 몇 백 미터씩 줄을 서고, 나중엔 경치 감상 보다는 짜증이 앞선다.점심 먹으러 서해 가지 갔는데, 거기도 내 돈주고 밥 사먹기는 불가능할 것 같아 나는 아예 배에서 먹다 남은 팬 케익으로 점심을 대신하다. 결국은 여화봉 오르는것도 포기해야 되었다. 이 인파를 따라 거기까지 갔다 올려면 또 하루를 이곳에 더 묵어야 될겄같다.
어쨌건 과연 황산이다.깊고도 깊은 계곡, 천길 낭떠러지에 기암괴석, 붉게 타오르는 단풍...
금강산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금강산에다 설악산을 합하면 이 정도의 비경이 될른지.
하산을 하다가 절 부근에서 절강성의 안경회사에 일하고 있다는 한국인 부부를 만나다.
내려 가는동안 오랜만에 한국말로 싫컷 수다를 떨고 나니 그나마 스트레스가 좀 풀리는 기분이 든다. 탕고행 버스를 탔는데, 두당 4원씩인줄 알고 내 딴에는 4인분 20원을 주었더니 내게 도로 10원을 돌려 준다. 알고 봤더니 일인당 10원씩이란다. 결국 이번에도 내 차비만 치룬 꼴이 되었다! 읍내에 가서 밥을 먹자니까 황산 시내에 가서 먹잔다.
황산 시내에서 하루 묵을 각오로 갔는데, 뜻밖에도 차표가 있다. 무조건 표부터 사다.
333원. 비싸기도 하다. 그들은 황산에서 하루 묵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들도 북경행 표를 샀다. 거기서 또 심양까지 가야한단다.
그들은 잉워 한 장에 잉쪼어 두 장, 그걸로 서로 교대로 누워간단다. 나름대로 돈을 절약하는 좋은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10/4 목 맑음
더럽게 걸렸다 내침대 아래는 노파와 너댓 되는 꼬마가 탔는데, 5시쯤 깨어서 애에게 노랠 시키고 있다. 누가 중국인 아니랄까봐 목소리들은 얼마나 큰지...
목이 아파오더니 콧물까지 흐른다. 황산에서 감기를 얻었지 싶다. 아침으로 겨우 오렌지 한개와 빵을 하나 먹고 있으려니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파오는데, 꼬마녀석은 함부로 내달리고, 내게도 엉겨 붙는걸 내가 매몰차게 떼어 버리니 노파의표정이 매우 언잖다. 점심을 건너 뛸까 하다가 약도 먹어야 할것같고, 생각해 보니 여태 먹은게 별로 없었던거 같아서 사발면을 하나 사 먹다. 오늘 저녁 북경 도착하면 히터가 있는 교원반점에서 자야겠다.
무료한 마음에 애들에게 보낼 엽서를 쓰고 책을 좀 보다. 북경에서 왕 가족과 이별을 하고 20번을 타고 교원반점에 드니 일본애 하나와 프랑스녀석 둘이 자고 있다.
오랜만의 핫샤워를 싫컷 즐기고 조선족 식당에서 김치 볶음밥을 시켜 먹는데, 주인 여자가 아는척을 한다.내가 그새 이집 단골이 되었네.
그러고 보니 북경이 많이 변했다. 없던 길이 새로 나고 버스는 모두 lpg차량으로 교체되었다. 약국에 가서 감기약을 달랬더니 이것들이 타이레놀과 마이신을 준다. 누굴 잡을 일이 있나? 중국인들은 감기 걸리면 마이신을 먹나보다. 내가 웃으면서 약 안산다고 하니 오히려 그들이 갸우뚱 한다.
그냥 누워 있으면 퍼질 것 같아 동네를 산책하다가 이발과 깐시를 했는데, 무성의 그 자체다. 이것들은 안마를 시켜야 아양도 떨고 하나 보다.내친김에 영정문에서 전문까지 걸어보았다. 8km쯤 되지 싶다.
오늘 밤엔 모험이다. 맥주와 고량주를 사서 한꺼번에 마셨다.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 감기 안떨어 지면 죽을 각오다.
10/6 토 흐림
아침 일찍 눈을 떴는데 녀석들은 깰 기색도 없다.
맥주 2병과 고량주 58도 짜리 한 병을 섞어 마셨는데 이상하게 가뿐하다. 고량주에 커피를 타서 마셔서인가? 이불 속에서 게으름을 좀 피우다 산책을 나서다. 3마오짜리 요우티아오(밀떡 튀김)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구두 도매시장으로 구경을 가다. 중국인들이 신는 신발은 모두 여기서 만드는 듯 그 규모가 엄청나다. 패션도 다양하고 값도 저렴하다. 저런게 한국에서 풀리니 장사는 폭리를 취하고 한국 신발 산업은 쪼그라 드느니...
동안문 쪽으로 갔다가 슈퍼에 들러 필요한 걸 사고 숙소로 돌아와 체크아웃. 집에 전화했으나 아무도 받질 않는다.남역 버스종점에 가니 어떤 노친네가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길래 자세히 보니 거의 한국 동란때 받은것들. 주위 사람들이 부축도 해 주고 자리도 양보하고 부산을 떤다. 사진을 찍고싶다니까 기꺼이 포즈를 취해준다.전문에 내려 지하철로 북경역에 가서 짐을 맡기려니 20원을 달란다. 이런 도둑년이 있나? 당장 짐을 내 놓으라고 해서 인근 가게에 5원을 주고 맡기다. 이것들은 외국인을 보면 아예 호구취급을 하려 든다.
남는 시간에 옹화궁으로 갈까, 시단으로 갈까 하다가 시단으로 향했는데, 잘못된 선택.
온통 바글거리는 인간들 틈새에서 답답하기만 하다.그냥 화단가 빈 벤취에 좀 앉았다가 북경역으로 돌아와서 조선족 식당에서 된장찌개로 밥을 먹고 드디어 평양행 기차에 오르다.
언젠가는 나도 이 기차를 타고 단동이 아닌 평양까지 가는 일이 있겠지...
기차 승무원이 남자다. 철로 선로 상태가 안 좋은지 기차가 몹시 흔들린다. 아랫쪽 침대는 여자들 차지. 아예 침대에 누워서 코나 훌쩍이고 음악이나 듣는 수 밖에.
아래쪽에선 두 여자와 한 남자가 해바라기 씨를 나눠 먹다가 급기야 남자 녀석이 맥주를 사서 돌리면서 나보고도 끼란다. 만사가 귀찮아 이불을 쓰고 잠을 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