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6 토 맑음
기차는 정확한 시간에 우릴 떨구었다.
밖은 아직 짙은 어둠에 쌓인채이다.
아농의 눈짓으로 둘은 먼저 출구로 나오고, 그녀가 지금은 시내버스가 없으니 조금만 기다리잔다.
잠간 있으라고 하더니 그새 성도 지도를 사 왔다.
82번을 타고 지아오퉁 반띠엔(交通飯店)은 28번이라더니, 아무래도 걱정스러운듯 자기랑 같이 가잔
다. 사양을 해도 막무가내, 막 출발하는 버스를 집어 타고 호텔로 향하는데, 두 정거장을 가더니
다 내리란다. 무슨일이가 했는데, 이놈의 차가 퍼졌나 보다.
차비를 돌려 달라니까 별 이상한사람 다 보겠다는 눈으로 나를 노려 본다
"아, 여기는 중국이지..." 중국 사람들은 제복 입은사람과 운전기사에겐 꼼짝 못한다.
다들 이미 낸 차비를 포기하고 제 갈길을 간다. 마치 잘 훈련된 병정처럼...
우리도 다음에 오는 버스를 잡으려고 애써봤지만 차마다 만원이고, 아예 서질 않는다.
아농이 택시를 잡고 호텔로 왔는데, 이 아가씨 기어이 지가 요금을 치룬다. 그리고는 체크인하는 내
게 방 번호를 알아가면서, 오후에 전화를 하겠단다. 내가 귀신에 홀린건지 원.
3인용 도미토리 방에는 스위스녀석 하나가 자고 있다. 들어서는 기척에 잠을 깨더니 대뜸 "니혼진 데스까?'이다.
강한 부정, "노 아임 어 코리언,앤 유?" "프롬 스위츨랜드" 하이, 하이, 수인사 끝나고 나도 바로 곯
아 떨어지다.
한잠 자고 일어나니11시, 녀석은 없다.
밥을 한 그릇 사먹고 신난먼 터미널에서 구채구행 버스 시간을 알아보니 하루 아침 일찍 한 대밖에
없다. 미리 표를 살까하다가 뒤로 미루다.
방에 와서 조금 있으려니 전화가 왔다. "워 쓰 아롱." 지가 지금 이리로 온단다.
10분도 안되서 도착했는데 택시를 탔단다. 돈도 많군...
성도 번화가를 구경시켜 준다기에 따라 나서다. 중국식 햄버거라는것을 사 주었는데, 맛이 요상하다.
그래도 매운 맛이 섞여 좀 나아서 맛있다고 했더니 "또 하나 더 먹을래?-아니, 배 불러"
그래도 맛있다니까 기분 좋은 모양이다.
지겨운 광장... 중국엔 웬만한 도시엔 인민광장, 노동광장 이라는 넓은 광장이 있는데, 여기서 사람
들이 운동도 하고 춤도 추고 공연도 하곤 한다.
성도라고 다를쏘냐, 다른데 가자니까 백화점에 가서 이것 저것 기웃거린다.
나로선 그게 그거고, 저게 저건데...
어느새 밤이 되고 내 여행계획은 서서히 차질을 보이기 시작한다. 우야노...
"장(姜), 우리집이 좋진 않은데 우리 집에가서 같이 밥먹자."
이건 또 뭔일? 중국인들은 식사를 초대해도 좀체 집으로 초대 않고 주로 식당에서 대접하는게 보통인
데, 이 아가씨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나... 별 생각이 다 든다.
저와 나는 그냥 기차에서 만난 사이고, 그냥 오늘 시내 안내를 해 주고는 집에가서 밥을 먹자니...
난 호텔로 들어가 봐야 한다고 사양했더니, 날 위해 시장까지 오전에 다 봐놨단거다.
하는 수 없이 따라나섰는데, 자기 회사 사무실 뒤라면서 어떤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혹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길이나 익히고 싶은데, 꼬불꼬불 복잡하기만 하다.
4층에 위치한 그녀의집이란델 와 보니 소담한 세간살이에 방 세개짜리 아파트이다.
거실에 TV를 켜 주더니, 땅콩과 분말 오린지 쥬스를 물에 타서 갖다 준다.
그리곤 부지런히 음식 장만을 한다.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도깨비에 홀린것같은 기분에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녀석이 밥을 하는 양을 보아하니, 압력솥
에 알루미늄 도시락 같은데 쌀을 담고 밥을 짓는다.
그리고는 토끼 고기와 오리고기를 그릇에 담고 나물을 볶더니 식탁에 차렸다.
술을 마시고 싶냐기에 그렇다니까 장식장에서 마시다 남은 걸 꺼내와서 한 잔 따른다.
그리고는 오리고기를 덥썩 집더니 내 입에 넣어주며, "이게 남자에게 아주 좋다"고 하는 그녀의 눈빛
이 예사롭지 않다.술은 누구거냐고 물으니 자기 어머니거고, 담배는 오빠거란다.
그런데 이상한건 방마다 문이 열려 있는데, 방마다 침대1~2개에 옷장 하나, 가정집 구조치고는 좀 이
상도 하다.
담배를 피우고 Tv를 보고있는데 "니 하오츨르 마?" "그래, 맛있었어, 특히 오리구이가."
그러자 마자 그녀가 내 가슴에 머릴 기대어 온다.
눈도 손도 어따 둬야할지 모르겠다. "이성의 승리냐, 본능의 패배냐, 이것이 문제로고!"
시간이 많이 지났다.그녀의 알아듣지 못할 신음소리, 혹 지금 당장이라도 낯선 남자가 문을 따고 들
어와 흉기를 들이댈것같은 두려움...
혼란 그 자체다. 여태 여행하면서 이런 사고는 쳐본적이 없는데...
그녀는 자고가란다. 나는 본의아닌 거짓말로 "호텔에 방을 같이쓰는 녀석이 있는데, 중요한것이 많
아 빨리 가 봐야한다"고 둘러대고는 후둘거리는 다릴 이끌고 숙소로 돌아왔다.
스위스녀석이 데이트하고 왔냐고 묻는다.
어떻게 아냐고 물으니 오후에 아가씨가 찾아왔단얘길 복무원이 했단다.
"그래 진 좀 빼고 왔는데, 넌 이런 경우 있었냐?"
"넌 대단한 행운아다. 좋다 내가 한 잔 산다. 축하한다." 머리 털나고 조건없이 서양놈으로부터 맥
주 얻어마시기도 첨인것 같고, 아무래도 오늘 일어난 일들은 모두 꿈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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